나는 숨막히는 감방 안에 있다
감방은 이 세상이다
숨통 조이는 감방은 낮게 내려앉는다
사방 구석에
네 마리의 지칠 줄 모르는 거미가 꿈틀거린다
교활하고 기름지고 더러운 거미
그들은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거미줄을 짠다...
(...)
- 『거미』, 지나이다 기삐우스
현대영화 연출의 혁명이라고 평가되는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기법’은 분절된 장면들, 다시 말해 연속성을 띠지 않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촬영된 장면들을 연출가의 의도 내에서 순차적으로 배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장면을 연속적인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이런 식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분절들은 인간의 의식 내에서 연속된 것으로서 새롭게 그 형태를 갈무리하는 것이다. 기실 언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이 ‘몽타주기법’의 성질을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수많은 현대의 언어학자들이 숱하게 지적해왔듯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를 지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표현되고 발화되고 명시되고 정의되는 말은 발화되기 이전의 침묵과 말의 병존상태에 있었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항상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영화도 글도 모두 이러한 인간의 의식, 혹은 무의식을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불완전한 옷’일 뿐이다.
그러나 그 형태 자체가 이미 분절되어 있는, 아주 특수한 ‘옷’이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의 음이다. 피아노의 음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음계로 분절되어 있으며, 여러 건반을 동시에 누른다고 해도, 건반을 아무리 오래 밟고 있는다고 해도 그 존재성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필연적인 불연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절된 음들은 귀를 거쳐 우리의 내면 깊이 들어와 감성을 자극하고 울린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완전한 선율이 된다. 그런 면에서 피아노의 음색은 ‘몽타주기법’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다.
그러나 피아노가 이끌어내는 음계들은 틀림없이 분절되어 있지만, 이를 연주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어떤 구분점으로도 나뉠 수 없다.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손가락은 항상 다른 대상 - 즉, 뇌로 대변되는 공간(이 단어가 주는 불편한 어감은 불가피하게 감수해야할 것 같다) - 의 지시를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인간의 가장 훌륭한 표현수단으로 손색이 없다. 피아노의 선율은 이미 하나의 충만한 언어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재훈의 음악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배태하고 있는 필연적인 분절성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더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분절성을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이를 자신의 음악적 성취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그가 자신의 예민한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부를 비롯한 곳곳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깊은 바다’, ‘분홍 돌고래’에서 돌고래의 움직임을 통해 잔 물방울들이 바다 표면과 부딪히는 소리, ‘봄비’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돌과 풀로 덮인 부드러운 흙을 찰싹 때리는 소리, ‘폭설’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창문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작은 눈발의 소리, 어느새 점차 거세진 눈발이 창문을 흔들고 방에 위압적인 공명을 이끌어내는 소리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낙하와 충돌의 소리’는 그의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청자의 감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
잔잔한 수면에 어딘가에서 작고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충돌한다. 이내 그 거대한 대양에 흡수되어 그 형상을 감춘다. 그러나 그 자취를 숨긴 형상은 수면 아래로 깊숙이 들어가 잠시 후엔, 주변에서 부유하고 있던 물길을 밖으로 밀어올린다. 파문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온다. 단 한 방울의 희생으로, 끌어올려진 물들은 수면에 작은 점을 형성하고 그 점은 곧 원을 만들어낸다. 그 원은 점차 그 둘레를 넓혀간다. 점차로 커진 원의 크기는 마치 새끼를 잉태하듯 그 안에 다른 원이 형성되도록 하고, 이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여러 동심원들은 어떤 방향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미지의 넓은 곳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단 하나의 음계가 잔잔했던 감성 내면의 깊은 공명을 이끌어내듯이.
그러나 평온한 상태에서 고여 있던 물과 충돌하는 물방울, 즉 통합의 순간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배태한다. 파문을 이끌어내어 우리 안의 새로운 의미들을 각기 여러 개의 크기가 다른 동심원들로 확장시키도록 한, 그 물방울은 수면과 충돌하는 폭력적 순간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다. 그 폭력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안을 이끌어내고 혼란을 야기한다. 우리는 그가 선사한 이러한 ‘파열’의 순간을 손가락으로 더듬듯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흰빛, 때론 회색빛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의 한 끝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감지하고, 이 어둠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어둠, 그리고 파열의 발작적인 움직임을 나는 ‘폭설’의 후반부에서 본다. ‘폭설’이 연주되는 내내 우리를 서늘한 한기로 감싸 안았던 그의 선율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 악마적 속내를 드러내려는 듯, 마치 재빠르고 혐오스럽게 움직이는 거미의 다리를 연상시키며 우리의 소름을 돋아 오르게 한다. 그 기름진 거미는 선연하고 유혹적인 무늬와 빛깔로 그 몸체를 치장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김재훈의 연주에서 그의 구름과 같은, 그 포근하게 부유하는 빛깔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 선율을 두려운 몸짓으로 받아들이며, ‘수난자’의 내면에 자리한 ‘파열’을 함께 감내한다.
‘분홍 돌고래’와 함께, 이번 앨범의 가장 대표적이고 주목할 만한 곡이 될 ‘폭설’의 원제목은 ‘작은 방’이었다. 그가 추운 겨울 지하의 독방에서 힘겹게 보듬어내고 이를 형상화해낸 그 결과물은, 곡을 쓰고 수백, 수천 번씩 연주하던 그 창조의 고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 스스로 만의 ‘정신의 방’인 셈이다.
이제 그가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우내 힘겹게 잉태해온 그의 추운 방이 작은 ‘창’을 하나 새롭게 달았다. 그 창은 얇고 섬세한, 그러나 그 파열의 진폭만큼이나 아름다운 떨림을 우리에게 주게 될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창문 앞으로 다가와 수군거리며 그 안에 불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불 꺼진 작은 방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음악은 어느새 우리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듯 그 농밀한 손길로 마취시키고는, 천국과 지옥이 혼재된 거대한 핏빛 대양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