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 공감하며


“시는 감정의 일방 배출구가 아님을 유념해주기 바란다. 언어를 함부로 배설하려는 경향은 시 창작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그가 쓰고자 하는 언어와 섬세하게 대결하고 그 언어로부터 사용 승인을 얻어야 하는 자이다. 쓰는 자가 자기 멋대로 언어를 지배하고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언어를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언어로부터의 자재자유함을 획득할 수도 있음을 우리 문청들은 모두 유념했으면 좋겠다. 시는 문학의 모든 장르를 통틀어 가장 엄격하게 ‘언어’자체에 대한 집중을 요하는 장르이고, 시인은 ‘말의 중압감’을 평생 고민하며 평생을 걸고 이 중압감과 대결해나아야 하는 존재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자각과 대결의식이 있어야 이 부박한 반(反)문학적 속도전의 시대에 여전히 시가 태생적 이단으로서의 문학적 반(反)속도성을 지켜갈 수 있을 것이다.”

- 2010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조정권, 송찬호, 김선우)


대학문학상 심사평이라기에는 다소 엄숙할만한, 묵직한 명문을 적어주셨다. 구구절절 동감하는 말이라 이곳에 옮겨 적기로 했다. 이는 비단 시 창작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이 글에서 주어이자 목적어가 되고 있는 문학이라는 말로 바꾼다고 해도 한 치의 모자람도 남음도 없을 것이다. 언어는 문학의 단 하나밖에 없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쥐고 있는 칼이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어떤 강도를 갖고 있는지, 날은 어느 쪽으로 서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부드러운 손잡이가 주는 감촉에만 매혹되어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면 그 누구의 가슴도 성공적으로 관통해내지 못할 것이다. 뜨끈한 피 한 방울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by 안개인간 | 2009/12/18 13:42 | | 트랙백 | 덧글(0)

그의 예술관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 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 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다시 시집을 열고 읽어보았다. 이런 시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순수시! 인생은 한 방울의 피도 방해할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좇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보라.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은 그렇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 - 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 사고 - 속에서 그렇게 끝나기 마련인 것이다. 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 최후의 인간은, 자신이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환원시킨다.

(...)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 예술은 우리의 오장 육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동질한다. 필사적으로 살인과 파괴와 증오와 타락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술은 달콤한 노래로 다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by 안개인간 | 2009/12/18 13:29 | | 트랙백 | 덧글(0)

‘티미르호’, 그 안온함의 이면에 주목하며


나는 숨막히는 감방 안에 있다
감방은 이 세상이다
숨통 조이는 감방은 낮게 내려앉는다
사방 구석에
네 마리의 지칠 줄 모르는 거미가 꿈틀거린다

교활하고 기름지고 더러운 거미
그들은 자꾸만 자꾸만 자꾸만 거미줄을 짠다...
(...)

- 『거미』, 지나이다 기삐우스


현대영화 연출의 혁명이라고 평가되는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기법’은 분절된 장면들, 다시 말해 연속성을 띠지 않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촬영된 장면들을 연출가의 의도 내에서 순차적으로 배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 장면을 연속적인 것으로 착각하도록 하는 기법이다. 이런 식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분절들은 인간의 의식 내에서 연속된 것으로서 새롭게 그 형태를 갈무리하는 것이다. 기실 언어라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이 ‘몽타주기법’의 성질을 필연적으로 배태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수많은 현대의 언어학자들이 숱하게 지적해왔듯 언어는 말하고자 하는 대상 ‘자체’를 지정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표현되고 발화되고 명시되고 정의되는 말은 발화되기 이전의 침묵과 말의 병존상태에 있었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항상 실패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영화도 글도 모두 이러한 인간의 의식, 혹은 무의식을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불완전한 옷’일 뿐이다.

그러나 그 형태 자체가 이미 분절되어 있는, 아주 특수한 ‘옷’이 하나 있다. 바로 피아노의 음이다. 피아노의 음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음계로 분절되어 있으며, 여러 건반을 동시에 누른다고 해도, 건반을 아무리 오래 밟고 있는다고 해도 그 존재성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필연적인 불연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절된 음들은 귀를 거쳐 우리의 내면 깊이 들어와 감성을 자극하고 울린다. 결코 끊어지지 않는 하나의 완전한 선율이 된다. 그런 면에서 피아노의 음색은 ‘몽타주기법’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다.

그러나 피아노가 이끌어내는 음계들은 틀림없이 분절되어 있지만, 이를 연주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어떤 구분점으로도 나뉠 수 없다. 그리고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손가락은 항상 다른 대상 - 즉, 뇌로 대변되는 공간(이 단어가 주는 불편한 어감은 불가피하게 감수해야할 것 같다) - 의 지시를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인간의 가장 훌륭한 표현수단으로 손색이 없다. 피아노의 선율은 이미 하나의 충만한 언어로 기능하는 것이다.

김재훈의 음악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배태하고 있는 필연적인 분절성을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더 나아가서 그는 이러한 분절성을 단지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이를 자신의 음악적 성취로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다. 그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그가 자신의 예민한 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부를 비롯한 곳곳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유난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깊은 바다’, ‘분홍 돌고래’에서 돌고래의 움직임을 통해 잔 물방울들이 바다 표면과 부딪히는 소리, ‘봄비’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돌과 풀로 덮인 부드러운 흙을 찰싹 때리는 소리, ‘폭설’에서 하얗게 얼어붙은 창문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작은 눈발의 소리, 어느새 점차 거세진 눈발이 창문을 흔들고 방에 위압적인 공명을 이끌어내는 소리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낙하와 충돌의 소리’는 그의 음악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청자의 감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


잔잔한 수면에 어딘가에서 작고 투명한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충돌한다. 이내 그 거대한 대양에 흡수되어 그 형상을 감춘다. 그러나 그 자취를 숨긴 형상은 수면 아래로 깊숙이 들어가 잠시 후엔, 주변에서 부유하고 있던 물길을 밖으로 밀어올린다. 파문은 항상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은 곳에서 서서히 올라온다. 단 한 방울의 희생으로, 끌어올려진 물들은 수면에 작은 점을 형성하고 그 점은 곧 원을 만들어낸다. 그 원은 점차 그 둘레를 넓혀간다. 점차로 커진 원의 크기는 마치 새끼를 잉태하듯 그 안에 다른 원이 형성되도록 하고, 이내 하나의 중심을 가진 여러 동심원들은 어떤 방향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미지의 넓은 곳으로 퍼져나간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단 하나의 음계가 잔잔했던 감성 내면의 깊은 공명을 이끌어내듯이.

그러나 평온한 상태에서 고여 있던 물과 충돌하는 물방울, 즉 통합의 순간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배태한다. 파문을 이끌어내어 우리 안의 새로운 의미들을 각기 여러 개의 크기가 다른 동심원들로 확장시키도록 한, 그 물방울은 수면과 충돌하는 폭력적 순간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다. 그 폭력은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불안을 이끌어내고 혼란을 야기한다. 우리는 그가 선사한 이러한 ‘파열’의 순간을 손가락으로 더듬듯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흰빛, 때론 회색빛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의 한 끝에 자리하고 있는 어둠을 감지하고, 이 어둠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어둠, 그리고 파열의 발작적인 움직임을 나는 ‘폭설’의 후반부에서 본다. ‘폭설’이 연주되는 내내 우리를 서늘한 한기로 감싸 안았던 그의 선율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 악마적 속내를 드러내려는 듯, 마치 재빠르고 혐오스럽게 움직이는 거미의 다리를 연상시키며 우리의 소름을 돋아 오르게 한다. 그 기름진 거미는 선연하고 유혹적인 무늬와 빛깔로 그 몸체를 치장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김재훈의 연주에서 그의 구름과 같은, 그 포근하게 부유하는 빛깔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 선율을 두려운 몸짓으로 받아들이며, ‘수난자’의 내면에 자리한 ‘파열’을 함께 감내한다.


‘분홍 돌고래’와 함께, 이번 앨범의 가장 대표적이고 주목할 만한 곡이 될 ‘폭설’의 원제목은 ‘작은 방’이었다. 그가 추운 겨울 지하의 독방에서 힘겹게 보듬어내고 이를 형상화해낸 그 결과물은, 곡을 쓰고 수백, 수천 번씩 연주하던 그 창조의 고통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 스스로 만의 ‘정신의 방’인 셈이다.

이제 그가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우내 힘겹게 잉태해온 그의 추운 방이 작은 ‘창’을 하나 새롭게 달았다. 그 창은 얇고 섬세한, 그러나 그 파열의 진폭만큼이나 아름다운 떨림을 우리에게 주게 될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창문 앞으로 다가와 수군거리며 그 안에 불안하게 자리하고 있는 불 꺼진 작은 방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음악은 어느새 우리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듯 그 농밀한 손길로 마취시키고는, 천국과 지옥이 혼재된 거대한 핏빛 대양에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 임호

by 안개인간 | 2009/12/16 23:19 | 망상 | 트랙백 | 덧글(0)

문학, 그리고 문학의 지위


문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문학을 어떤 절대적 지위에 올려놓고 그 지위를 단단히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 독자와 작가의 사이에 경계선이 가로놓이는 순간, 문학이 주는 풍성한 의미들은 오히려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훌륭한 문학이 자신의 세계에 대해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문학을 접하는 독자도 항상 그 문학 자체에 대해 ‘여지’를 두어야 한다. 문학이 항상 대상의 뚜렷한 형태보다 그 그림자가 가지는 의미들을 확장하는 데에 본연의 임무를 두어왔던 것처럼, 문학을 접하는 독자는 항상 그 대상 이면에 틀림없이 존재하는 어둠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이 삶으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처럼, 이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사랑이 더 이상 참다운 사랑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항상 그 대상의 절대성에 회의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한다. 문학의 유일한 도구가, 이 세계의 만물 중에서 가장 많은 불안을 담지하고 있는 ‘언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많은 문학연구자들은 앞서 경고한 실수들을 (아주 놀라울 정도로!) 매우 자주 범하는 것 같다. 문학이 우상화되는 순간 독자는 문학이라는 틀 안에 완전히 함몰되어, 문학 이전에 존재했고 문학을 잉태한 그 힘, 즉 인간과 신, 삶과 사랑 등의 문제를 완전히 배제하게 된다. 단지 문학만이, ‘절대’라는 색깔의 불투명한 포장지 안에 자리를 잡고 고정되어 버린 요소들만이 문학의 가치를 대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문학에의 탐구는 주객전도적인 행위로 그 본연의 힘을 잃고 타락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패착을 범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적 역량’이 아닐까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하는 ‘문학적 역량’이라는 것은 문학을 꼼꼼히 독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아닌, 문학의 본질적 힘, 즉 ‘창조적 역량’을 말하는 것이며 이 능력을 가진다는 말은 작가와 독자 간의 견고한 경계가 이미 허물어져 있다는 것, 둘 사이의 소통의 폭이 매우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작가적 역량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문학을 연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의 배경이자 문학을 애초에 배태해 낸, 삶과 맞닿은 문제들에 대해 반성과 사색을 충분히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 이 본원적 요소들을 이미 탐구의 과정에서 망각해버린 사람이 문학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발굴해 낼 수 있을까? 오히려 이는 잠재적 능력을 가진 다른 후배 독자들에 대한 폭력이자 해악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문학에서 잠시 손을 떼고,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시간을 갖는 게 좋을 것이다. 문학이 항상 우리에게 주지시키는 그 위대한 침묵의 순간을 말이다.

by 안개인간 | 2009/12/16 20:12 | 망상 | 트랙백 | 덧글(0)

겨울을 맞이하며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간다. 반팔 옷을 입고 땀 흘리며 개강 수업을 듣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이다. 이번 학기에 수강한 여섯 과목 중에 러시아어수업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학수업이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읽기 텍스트의 분량을 소화하느라 조금 버거웠지만, - 동시에 서너 개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며, 시험 때는 Ox Press의 가뜩이나 글씨가 작은 문자들과 씨름하느라 눈이 너무 아파 매일 당근주스를 사먹기도 했다 - 아마도 문학과 인간에 대해 가장 깊게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학기였지 않았나 싶다. (이미 읽었던 작품이 꽤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따라가기가 많이 어려웠을 것 같다.)

체홉의 전혀 멋부리지 않은, 그러나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깔끔하고 묵직한 문장들에 전율을 느껴보기도 하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는 나 자신의 예술관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역시 ‘도스또예프스끼는 불멸’(불가꼬프의 언급)이라고 속으로 외치기도 했다. 27세에 마지막 작품, 『우리시대의 영웅』을 남기고, 자기 소설의 주인공처럼 낭만주의적인 최후를 맞은 레르몬또프의 작품에서는 마초성과 낭만주의(바이런주의)의 진수를 맛보기도 했다. Hawthorne의 글을 읽으면서 모호성(ambiguity)과 환상성이 성공적으로 어우러지는 성취를 엿보기도 했으며, Woolf의 신경질적인 서술을 힘겹게 따라가다가 짜증을 내다가도, 마지막 장을 덮으며 ‘역시 클래식은 클래식’이라고 감격하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내 친한 친구를 보고 ‘쟤는 음악에 미친 애야. 너도 좀 뭔가에 미쳐봐라.’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던 게 불과 일 년 전이다. 글 읽기가 가장 즐거운 취미이자, 글쓰기가 나름대로의 특기가 되어버린 지금의 나는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문학에 미쳤다’고.

* 한 학기 동안 읽었던 목록 - 참고문헌이 아닌, 수업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저서들 - 을 아래에 첨부하고자 한다. 이는 정말 즐겁고도 의미 있었던 학기를 기념하고, 스스로의 문학에 대한 애정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The Scarlet Letter
, N. Hawthorne
The Adventure of Huckleberry Finn, M. Twain
Sister Carrie, T. Dreiser
Heart of Darkness, J. Conrad
To The Lighthouse, V. Woolf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체홉
『우리들』, 자먀찐
『마호가니』, 삘냑
『질투』, 올레샤
『편지』, 바벨
『레퀴엠』(시선집), 기삐우스, 아흐마또바, 쯔베따예바, 아흐마둘리나
『광기의 에메랄드』(시선집), 마야꼬프스끼
『벨낀이야기』, 뿌슈낀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고골
『가난한 사람들』, 도스또예프스끼
『상자속의 사나이』, 체홉
『우리시대의 영웅』, 레르몬또프
『아버지와 아들』, 뚜르게네프
『오블로모프』, 곤차로프
『무엇을 할 것인가』, 체르니세프스끼
『강철은 무엇으로 단련되었는가』, 오스뜨로프스끼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또예프스끼
『거장과 마르가리따』, 불가꼬프
『예브게니 오네긴』, 뿌슈낀

by 안개인간 | 2009/12/15 18:34 | 잡담 | 트랙백 | 덧글(0)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